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보면, 선생님이 아이들을 모아 놓고 엄석대의 만행을 밝히라는 장면이 나온다. 겁먹은 아이들 중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조그만 아이 하나가 교실 밖으로 뛰쳐나가며 외치는 말. "저 XX 순 나쁜 XX에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 엄석대는 끝이다.
몇 년 전 화제가 된 환경소송을 친구네 사무실에서 맡았다고 하여 전화를 해봤다. 곧 기일인데 상대방 서면 때문에 정신 없다면서, 500~600장 정도 반박서면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네가 혼자 다 쓰냐 물었더니, 변호사 3명이 쟁점 하나씩 맡아 각자 150~200장 내외로 작성하고 취합한다고 했다(그러면서 친절하게 재판부 보기 편하도록 50장 내외의 '요약'서면도 따로 낼 것이라고 했다). 상대방 서면이 대체 어떻길래 기일 직전에 반박서면 하나를 그만큼 낸다는 것인지, 담당변호사도 주심판사도 아니라는 데 매우 안도했다.
많은 분들이 갈수록 서면이 길어진다고 얘기한다. 길어질 뿐만 아니라, 밑줄도 긋고 글자 크기도 키우고 심지어 컬러로 출력해서 서면을 제출한다. 공방이 치열해지다 보면 그렇기도 하겠으나, 하나의 쟁점에 관하여 150~200장을 써야 할 필요가 있나 싶다. 쟁점 하나에 그만큼 해설해 놓은 주석서도 잘 못 본 것 같다.
학술논문이라면 분량의 많고 적음이 문제될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준비서면은 재판부와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500~600장짜리 서면을 제출하면 저절로 설득이 될까? 결론을 읽을 때쯤이면 앞의 쟁점은 무엇인지 잊어버리지 않을까? 설득할 자신은 없으나, 의뢰인에게도 보여줘야 하고 재판부에도 할말 많다고 보여줘야 하니, 이것저것 붙여 서면이 길어지는 것은 아닐지.
서면 쓰다 막힐 때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생각난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지 않은가. 그러나 의뢰인이 상대방한테 욕을 해달라고 비싼 수임료를 내지는 않았을 터. 그것도 신성한 법정에서. 그러니 하고 싶은 말은 사실 "저 XX 순 나쁜 XX"인데도, 그걸 어떻게 잘 포장하려니 미사여구를 찾게 되고 서면이 길어진다.
핵심을 정확하게 짚었다면 길게 장황하게 서면을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간단명료하고 똑 떨어지며 누구도 반박 못할 엄격한 논리의 결정(結晶). 언젠가 필자도 그런 경지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환상을 품은 채, 늘어져버린 서면에 밑줄도 긋고 글자 크기도 키우고 있다. 물론 제출할 때는 컬러로 꼭 출력할 것이다.